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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 수렴

김아람 개인전 《뉴트리아, 닭 그리고 개》에 대하여

(예술공간 의식주, 2023. 11. 8–19)

안재우(독립 큐레이터, 문화 평론가)

 적지 않은 수의 예술 작품들은 ‘구별화와 동일화의 공존’이라는 모순을 지닌다. 감상자는 예술가의 위대한 작업을 감상하며 ‘이걸 대체 어떻게 창작했을까,’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창작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와 같은 감동에 휩싸일 수 있다. 이때 감상자의 마음 속에서는 예술가와 자신 사이에 ‘이것을 창작한 예술가’라는 인간의 개념과 ‘이것을 창작하지 못하는 나’라는 인간의 개념이 설정되어 그 둘 사이의 구별이 형성된다. 하지만 동시에, 출렁이는 마음을 지닌 감상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출렁이는 회화를 감상하며, 타자화의 아픔을 겪는 감상자는 낸 골딘의 사진을 감상하며, 그리고 삶의 이유를 고민하는 감상자는 실비아 플래스의 시를 감상하며 예술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타인이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위대한 예술가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야 만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예술가가 해냄으로써 감상자는 동일시를 통한 감흥과 영감을 누리게 되는데, 좀 더 능동적인 감상자는 그 감흥과 영감 뒤에 또 하나의 선물이 숨어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선물이란 ‘가능성’이다. 타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유의미하게 응시하는 일이, 비록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여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 또한 감상자는 쟁취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전시의 관람이 일상적인 내게 예술공간 의식주에서 개최된 김아람의 《뉴트리아, 닭 그리고 개》의 관람이 일상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탐구하는 김아람은 인간의 내면을 재현하는 작업을 초월하여 인간이 아닌 존재의 내면을 재현하고, 역설적으로 그 재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을 온전히 재현하는 일도 충분히 불가능에 가깝거늘, 인간이 아닌 존재의 내면을 인간이 재현하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들은 이에 도전해왔고, 따라서 그 도전 자체는 예술사에서 희소한 일이 아니다. 한데 김아람의 도전은 그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희소성을 지닌다. 대부분의 도전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동물의 삶을 표현하는 반면, 김아람은 그런 관점이 구조적으로 지니는 속성인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권력 관계를 해체하고 자신의 관점을 최대한 동물의 관점에 수렴시켜서 도전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하는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동물이 하는 동물 이야기’로 서사의 주체와 예술적 자아를 일치시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전시의 제목에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처럼, 이 전시에는 닭, 개, 그리고 뉴트리아에 대해 이러한 시도들이 담겨 있다. 닭을 다룬 세 영상 작업인 <꼬끼오 늘리기>, <닭 되기(아침 꼬끼오)>, 그리고 <닭 되기(도시 꼬끼오)>에서 김아람은 닭의 울음을 재현하는데, 흥미로운 건 닭의 생물학적 현상을 재현하면서 정작 닭을, <닭 되기(아침 꼬끼오)>에서 닭 농장의 폐쇄 회로 영상을 일부 인용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닭 대신에 등장하는 것은 작가 본인이며, 작가 본인이 닭의 울음을 훈련하여 시도한다. <닭 되기(아침 꼬끼오)>에서는 상하 분할 화면 편집을 통해 화면 상단에는 일출과 함께 닭 농장의 닭들이 우는 폐쇄 회로 영상이, 하단에는 김아람의 침실에서 같은 시각에 켜지는 실내 조명 장치 아래에 사람인 김아람이 닭과 마찬가지로 아침 울음을 실천하는 퍼포먼스 영상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김아람의 울음은 닭의 울음과 여러 이유로 명백히 다르다. 우선 발성 기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인 음향적 차이가 있고, 닭의 울음은 일출의 햇빛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생리적 행위인 반면 김아람의 울음은 이를 예술적으로 학습하고 표현하는 행위이다. 한데 이 둘은 주요한 공통점 또한 명백히 공유하는데, 이는 ‘빛에 반응하여 행하는 울음’이라는 행위 그 자체이다. 지난 수 천년에 걸쳐 진행되어 온 닭과 인간 사이의 관계사를 생각해보라: 그 역사 속에서 인간의 닭과 관련된 일반적 행위는 닭을 사냥하는 행위, 사육하는 행위, 먹는 행위, 그리고 달걀을 획득하는 행위 등이며, 문화/예술적으로는 12지지 중 하나로 닭을 선정하는 행위 또는 동요에서 닭의 울음을 흉내내는 행위 등이다. 반면 김아람의 시도는 이런 전형성과 거리가 있다. 식재료의 정체성을 지닌 닭의 인간과의 권력 관계 또는 닭에 대한 인간의 예술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 서사의 주체(인간)와 예술적 자아(닭)의 불일치 관계와 달리, 김아람의 닭 울음은, 비록 완전한 일치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여도, 그 일치를 위한 의도 자체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비-예술적 맥락과 예술적 맥락의 전형적 권력 관계가 해체되었을 때 우리가 비로소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닭의 진정한 정체성과 기존의 역사에서 그러한 관계들 속의 인간의 정체성을 동시에 향한 완전한 한 걸음인 것이다.

안재우 그림1.png

닭 되기(아침 꼬끼오), 단채널 영상, 2’28”, 2023
youtu.be/Uf5hyAgTuwg

안재우 그림2.png

닭 되기(도시 꼬끼오), 4K 단채널 영상, 1’58”, 2023

youtu.be/d0m-t9CtYoI

스크린샷 2023-11-14 오후 3.52.37.png

꼬끼오 늘리기, FHD 단채널 영상, 4’13”, 2022

youtu.be/s7MiknMcSD0

 이는 전시의 나머지 세 작품인 <개>, <박멸의 공존1>, 그리고 <박멸의 공존2>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에서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사는 개의 신체에 바디캠(bodycam)을 입힘으로써 개의 생물학적 눈과 매우 가까운 시점에서 작동하는 카메라를 통해 개가 바라보는 보호소, 함께 사는 다른 유기견들, 그리고 보호소 관리인과 방문자라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김아람 본인 또한 바디캠을 착용함으로써 유기견과 자신 사이의 교감을 1인칭 시점으로 재현한다. 개와 사람의 두 시점은 김아람과 보호소 관리인 사이의 대화 소리와 중첩되어 있으며, 이 대화는 일반인들의 일상으로부터 배제되어온 유기견과 유기견 보호소가 처한 현실을 알린다. 보호소의 포화 상태가 반증하는 반려견 유기의 실상, 입양되지 않는 유기견들이 보호소에서 영위하는 척박한 삶, 그리고 과포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죽음 등, 인터넷의 수많은 반려견 영상이나 반려견 사료 광고처럼 반려견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형성하고 지배하는 주류 영상이 보여주지 않는 반려견의 사회적 정체성, 즉 인간과의 관계 내에서의 정체성이 ‘취재’라는 인간-동물 권력 관계가 아닌 ‘시점의 수렴’이라는 해체적 방식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개, 2 채널 영상, 10’51”, 2023

youtu.be/iAd0HfNhJ68

 한국에서 생태계 교란 생물로 지정되어 박멸 대상이 된 뉴트리아와 이를 포획하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박멸의 공존1>과 <박멸의 공존2> 또한 마찬가지이다. ‘닭 = 식품,’ 그리고 ‘개 = 반려 동물’이라는 주류 담론의 함의 중 하나인 ‘닭과 개는 인간에게 이로운 동물’하고는 달리, ‘뉴트리아 = 생태 교란 생물’이라는 주류 담론은 ‘뉴트리아는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을 함의하는데, 김아람의 작업은 광역수매제, 즉 일반 시민이 뉴트리아를 포획하면 마리 당 2만원을 낙동강유역환경청에서 포획자에게 지급하는 제도를 활용하여 뉴트리아의 존재가 오히려 경제적 이윤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따라서 그 제도를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에게 뉴트리아가 이로운 동물인 상황을 이번에도 취재가 아닌 시점 수렴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박멸의 공존1>에서는 작가 본인 외에 두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뉴트리아 포획으로 1억원 이상의 포획금을 벌었다는 포획 전문가와 뉴트리아 박멸 정책의 윤리성과 실효성을 고민하는 동물자유연대의 활동가이다. 인류학의 연구 방법론 가운데 질적 방법론으로는 문헌연구법, 면접법, 그리고 참여관찰법 등이 있는데, 김아람은 뉴트리아의 한국 생태계 교란에 대한 문헌연구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 행간에 숨어있을 수 있는, 즉 문헌을 통해 배제된 사항들을 파악하고자 낙동강 현지에 가서 두 인물과 직접 면접을, 그리고 특히 포획자하고는 참여관찰의 방식도 병행하여 작업을 수행한다. 두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눔으로써 뉴트리아에 대한 전형적인 저널리즘이 명시하지 않은 것들이 작업에 드러나고, 참여관찰을 통해 뉴트리아 포획자의 일상을 몸소 체험하여 작가의 시점이 포획자의 시점으로 수렴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의 작업을 하면서도, 그 결과물은 인류학 논문이 아니라 분명 예술이다. 비누를 조각하는 신미경의 작업 결과물은 비누로 깨끗이 씻은 몸이 아니라 예술인 것처럼, 김아람은 학문적 도구를 이용하여 ‘학문’이 아니면서도 학문적 가치가 있는 ‘예술’을 실천한다. 뉴트리아 연작은 뉴트리아에 대해 정부, 포획자, 그리고 환경활동가가 취하는 행위에 대한 인류학적 가설을 세운 뒤 학문적 연구 방법론을 통해 그 가설을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이 아니다. 김아람은 논증을 통한 감상자의 논리적 설득을 작업의 목표로 삼는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보다는 대화와 현장 참여를 통해 포획을 하는 존재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서보기도 하고, 반대로 바디캠과 퍼포먼스적 나레이션 등을 통해 포획을 당하는 존재하고도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가까울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배치시키기도 하는 예술 작가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는 학문을 통한 지식의 습득 행위하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가 언론과 논문 등의 문헌을 통해 인간-뉴트리아 관계에 대해 습득하는 지식은 그 관계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지식적으로 분명 좁히기도 하지만, 카카오톡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전송하는 것과 직접 만나서 포옹을 하는 것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문헌이라는 메시지가 구조적으로 갖는 거리감을 초-문헌적인 방식인 예술을 통해 해체시켜 발생하는 새로운 깨달음과 영감의 포옹이 김아람의 작업에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감은 감상자에게 문헌을 대하는 본질적인 태도에 또한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문헌-독자 관계가 지닌 구조적 거리감에 대한 이해가, 그리고 그 거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는 시점 수렴의 무수히 많을지도 모를 가능성들을 발견해 나가는 여정이 점화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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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멸의 공존1, 단채널 영상, 26’26”, 2021

youtu.be/lezsQMUsm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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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멸의 공존2, 단채널 영상, 11’59”, 2023

youtu.be/LAo5bhWCe78

 그렇다, 김아람은 인류학자가 아니라 인류예술가이다. 비록 전시의 제목은 《뉴트리아, 닭 그리고 개》이지만, 제목을 지은 건 인간이기에 제목에는 그 세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념이, 그리고 이 동물들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내재한다. 그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관계에 대한 정밀한 이성적인 답이 아닌, 질문 자체의 재현을 통해 질문하는 태도와 행위의 가치,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그 관계 속 우리 인간의 태도, 행위,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깨달음이 관람의 끝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아람의 시점 수렴은 나와 동물의 시점 수렴이기도 하지만, 그 영감은 더 나아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나’의 시점이 궁극적으로 내 진정한 정체성의 시점과 가까워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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