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왜 어떤 종은 반려되지만, 어떤 종은 박멸되는가?: 〈박멸의 공존〉이 매듭 짓는 현실

황재민 (미술 평론가)

1.

무구한 세월 동안 자연과 인간은 서로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속되었다고들 한다. 이 서술은 무척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사실 인간이 이 말에 닿기까지 많은 시간과 담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연을 겨눈 통제의 담론, 그리고 개입의 담론 등을 거쳐, 마침내 자연과 인간 사이 기저에 기존재한 숨겨진 연결을 발굴, 혹은 직면한 다음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까지. 공생의 근거를 집요하게 밝혀내는 세포 단위의 철학에서부터 폐허가 된 생태 위에서 기능하는 버섯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가까이에서 세계는 나눠 가졌던 “반려종(Companion Species)”을 비롯, 여타 타자들의 존재에 대고 불을 밝히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요구되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반려종”의 담론을 말하며, 다음과 같은 열쇳말로 풀어 쓴다. 그것은 공구성, 유한성, 불순성, 역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운동의 형태로 우연히 매듭지어진 세계 위에서, “물리-기호적 육체로 현전하는” 동물을 진짜로 보기 위해 개의 집과 동물의 집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몸을 맞대고 서로의 유전체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 적힌 난잡스러운 짝짓기와 감염의 기록에 대해 깨닫는 일이다. 인간의 분자 속 숨겨진 헤맴과 오염과 이형 변화와 돌연변이의 기록들, 그것은 오로지 손을 뻗어 타자의 세계로 가까워질 때야 진정으로 알 수 있다. 풀 썩는 냄새가 풍기는 개집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눠 가지는 “존재론적 안무”. 이 몸짓을 통해 인간은 지난 세계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세계라는 비극을 새로 볼 수 있다.[1]

 

동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공생의 시간으로 다시 읽으며, 담론은 타자에 대한 서사를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새 이야기가 그렇듯, 담론은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거나, 세상을 단번에 변화시키거나 하지 못한다. 오히려 담론은 종종 곤욕스러운 도착지로 향할 때가 있다. 그곳에서는 습하고 축축하고 껄끄러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동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공생의 시간으로 다시 읽는 일은, 세계 속에 존재했던 모든 “반려”와 공생의 역사는 복잡하고 어지러울 뿐 아니라 가끔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며, 이론적 드라마의 통일감 있는 결말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더욱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기술과학의 세계 속에서, 왜 어떤 동물은 반려의 방식으로 관리되며 어떤 동물은 박멸의 방식으로 관리되는가?

 

2.

매듭을 푸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지는 이 질문은, 작가 김아람이 꾸준히 탐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 어떤 동물은 반려되며 어떤 동물은 박멸되는가? 그는 질문에 자답하기 위해 비둘기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비둘기는 어떤 환대 속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기피종에 속한다. 국가가 공인한 유해종에 속하기도 했던 그들은, 도심에 그토록 흔하면서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김아람은 하천 주위를 떠도는 비둘기를 한 마리 잡아다가 며칠 동안 같은 방에서 ‘공존’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이라고 할 만한 풍경을 만들었다. 이 상황은 일종의 비디오 에세이로 엮여 작업이 되었고, 또 《도브맘(Dovemom)》(2019)이라는 이름의 전시로 갈무리되었다.

 

《도브맘》은 공존에 대한 모순적인 실험이었다. 이를테면 비둘기가 반려의 의사를 먼저 내비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의적으로 반려를 결정했다는 부분에서, 그리고 작가가 비둘기를 사랑하거나 환대하기보다는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비둘기에게 진심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며칠에 이르는 공존, 그리고 며칠에 이르는 전시 끝에 작업은 마무리되었지만, 무언가가 해결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답을 더듬기 위한 시도가 이처럼 불명확하게 마무리된 다음, 작가는 같은 질문을 다른 프로젝트로 전개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가 찾은 다른 대상은 다름 아닌 뉴트리아였다.

 

3.

타자성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물은 무엇이 있을까?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낯선 언어를 배우고 눈높이를 맞춰야만 한다. 언어를 건네받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경의를 갖춰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를테면 뉴트리아의 세계에 필요한 경의를 갖출 수 있을까? “뉴트리아를 잡아서 에어프라이기에 넣어서 먹어보자!”[2]라는 제목을 단 유튜브 채널의 비디오 섬네일부터 “뉴트리아 잡아서 1억 번 사냥꾼 아저씨”[3]정도의 제목으로 바이럴된 인터넷 신문의 기사 제목까지, 필요한 경의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협잡스러운 인간의 세계가 뉴트리아의 세계 바깥을 둘러싸고 있다. 유해종일뿐더러 희귀하지도 않으며, 가치란 오로지 죽음과 박멸로부터 나오는 동물을 위하여 대체 누가 예의를 갖출 것인가?

 

“반려종”의 모든 흔적은, 그 분자 단위에서 시작해, 인간 주체와 타자가 항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연결이 곧 평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공생은 인간의 것이다. 그리고 이 기울어진 공생이 남긴 해결되지 않은 빈 곳에서는 곤욕스러운 현실이 자신을 드러낸다. 오로지 박멸의 방식으로만 관리될 수 있는 무엇, 공생의 상상력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동물 개체가 있다는 것, 환대와 반려의 담론이 적용되지 않는 기호가 있다는 사실 역시 그와 같이 곤욕스러운 현실의 사례일 것이다.

 

그러므로, 뉴트리아라는 개체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그들은 한국의 자연환경에서 자생한 개체가 아니라고 알려져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들은 80년대 후반 고기와 모피의 이용을 위해 유럽으로부터 수입된 종이라고 하는데, 누구도 “괴물쥐”의 고기를 먹고 싶어 하지는 않았던 것인지, 수요가 없다시피 해 일부는 폐사되고 일부는 방사되었다. 그렇게 방출된 뉴트리아는 인간종의 관심이 잘 닿지 않는 틈새에서 번식하기 시작한 모양인데, 그 결과 농작물에 피해를 주거나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아무튼 피해를 생산해내기에 이르렀다.[4] 이것을 한 줄기의 이야기로 엮어 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비대칭적인 생태계를 교환하는 폭력을 저지르더니, 그것이 나름의 생태를 갖추자 다시 한번 박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게 필요한 건강한 결말은 단순할 것이다. 인간종의 깊은 반성, 공생에 대한 깨달음,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물러나며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공존.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나약한 내러티브를 허용하지 않는다.

 

김아람은 신작을 진행하기 위해, 한국에서 뉴트리아를 처음 발견한 민간인이라 알려진 “뉴트리아 사냥꾼 아저씨”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사냥꾼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처음에 그는 어두운 밤만 되면 배추밭을 망쳐 놓는 고약한 짐승의 정체를 쫓기 위해 사냥을 시작했다고 한다. 겨우 포착한 짐승의 정체는 생전 처음 보는 꼬리가 긴 포유류였는데, 동물을 들고 환경청을 찾아 갔지만 아무도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이후 해당 포유류가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되어 수매제도가 신설되자, 사냥꾼은 이들을 잡아 용돈 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사냥을 시작했던 당시에는 인터넷에 정보도 없었던 그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고, 그들을 위한 덫을 만들고, 사체는 냉장고에 빼곡히 채워 얼려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옮겨 보상을 받고… 그렇게 그는 점점 더 사냥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냥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리고 대체 왜 사체를 냉장고에 물건처럼 던져두는지… 더 나은 장소가 존재하지는 않을까? 이를테면 미술관 관객의 눈과 같은, 하얗고 깨끗한 가상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사냥꾼의 행동은 우악스럽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뜬 눈으로 배추밭을 빼앗길 수는 없는 법이며, 윤리적인 죽음을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 고통 없는 안락사를 위해서는 일산화탄소를 사야 하고, 짐승 사체를 애도하며 보관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셈이 맞는 죽음을 위해 고통은 남아 있어야만 하며, 이렇게 현실은 매번 기이할 정도로 강력해서 최소한의 윤리조차 허용하지 않을 때가 있다. 또한 김아람은 사냥꾼이 강아지를 기르고 있으며, 어미가 세상을 떠난 새끼 고양이들의 밥을 챙기며 돌본다는 사실도 작업에 함께 담아내는데, 뉴트리아 사냥꾼인 그가 다른 동물은 또 아낀다는 모순은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장면은 나약한 내러티브를 압도하는 현실의 측면을 포착하는 일에 기여한다.

 

작업 〈박멸의 공존〉(2021)을 구성하며, 작가는 사냥꾼 뿐만 아니라 낙동강유역환경청의 담당공무원과 동물자유연대의 상근자 등을 찾아 공존에 대해 묻기도 했다. 각각의 답변은 물론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 조금 답답하며 조금 허무한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낙동강청의 입장은 이렇다. 그들은 뉴트리아가 퇴치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것이 번식력이 강하며 제방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고(실제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례로 미루어 보았을 때), 또 토속종을 잡아먹고 있다며 문제제기한다(그러나 외래종과 토속종을 무엇이 규정하며, 누가 규정할 수 있을까? 1980년대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뉴트리아는 벌써 꽤 오랜 세월 여기서 살아 남았다). 동물자유연대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데, 그는 우선 특정 개체가 피해를 유발하기에 박멸해야 한다는 생각은 1차원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역시, 뉴트리아를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곧 공존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불필요한 고통을 생산하지 않는, 좀 더 윤리적인 죽음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며, 뉴트리아의 세계에 대해 인간의 세계가 제공할 수 있는 공존은 박멸뿐이다. 〈박멸의 공존〉이라는 작업의 자조적인 제목은 이렇게 도출된다.

 

4.

김아람의 전작은 독백이나 일기에 가까웠다. 작업에서는 작가와 비둘기, 단 둘의 모습이 강조되었고 인간인 작가 본인의 발화는 혼잣말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박멸의 공존〉에서, 김아람은 관련된 사람들을 따라붙고 질문하고 추궁한다. 독백 대신 대화가 있으며 이것은 더욱 풍부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 여기에는 유해종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가까이 갈수록 결국 인간의 세계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있다. 〈박멸의 공존〉에서 뉴트리아는 현전하지 않는다. 덫에 갇혀서 우왕좌왕 돌아다니며 겁을 먹은 뉴트리아, 죽어서 냉동된 뉴트리아, 검색 포털의 검색 결과 속 이미지로 존재하는 뉴트리아. 그러므로 작업이 스크리닝된 전시장에서, 뉴트리아가 오직 머리뼈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 역시 일관된 일이다. 그들은 갇히거나 죽거나,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살아 있다.

 

〈박멸의 공존〉에는 반려와 박멸 사이, 담론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그곳, 유해종의 비가시성을 가시화하려는 노력이 있다. 작가는 뉴트리아의 세계를 둘러싼 사람들의 세계, 사냥꾼의 세계와 공무원의 세계를 넉살 좋게 따라간다. 김아람은 사냥꾼 아저씨의 영웅담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현실 속 구성원의 모습으로 스며들고, 서사를 인위적으로 조형하지 않는 고군분투를 통해 의외의 수행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결과, 공존의 어려움과 박멸의 필요를 납득하게 된다는 기이한 역설이 벌어진다. 어쩌면 〈박멸의 공존〉은 반쪽짜리 결말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종의 세계로부터 타 종의 생태를 굽어본 결과이며, 그렇기에 왜곡된 결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직 바로잡을 수 있는 왜곡의 목록이 남아있다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려”의 모든 역사에 실은 이주와 오염의 역사가 숨어 있듯, 박멸의 역사를 계속 쫓다 보면 그 안에 진짜로 숨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세계는 우리에게 충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그 바깥의 세계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현실의 껍질을 벗기면 언제나 거기엔 더 축축하고 괴로운 현실이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유한한 세계 속 모든 개체가 벗어날 수 없는 매듭, 현실이라는 매듭의 장력(tension)이 빚는 결과값일 것이다. 〈박멸의 공존〉은 이와 같은 사실을 효과적으로 축약하면서도, 현실이라는 곤욕스러운 도착지를 외면하지 않는 실천이기에 흥미롭다.

 

 

[1] 주석 1, 도나 해러웨이, 「반려종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2] 유튜브 채널 “헌터퐝”, 2021년 6월 26일 게시. https://youtu.be/yHNxampFkG4

[3] “생태계 파괴하는 ‘괴물쥐’ 뉴트리아 싹다 잡아 포상금 ‘1억원’ 번 아저씨”, 인사이트, 2019년 8월 25일 게시. https://www.insight.co.kr/news/243163)\

[4] 이도훈, 길지현, 김동언, 「뉴트리아 (Myocastor coypus)의 국내 분포 및 서식 현황에 관한 연구」, 『한국환경생태학회지』 27(3), 2013, 317p.

bottom of page